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ncc.phinf.naver.net/img02.jpg|width=100%]] {{{-2 젊은 시절}}} {{{-3 (1815년)}}} }}} || [[독일]][* 엄밀히 말하면,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당시의 독일 지역은 [[함부르크]], [[프로이센 왕국|프로이센]] 등의 여러 나라들로 나뉘어 있었고, [[독일 제국]]으로 통합되어 '독일' 이라는 나라가 등장했을 때는 쇼펜하우어가 사망하고 11년 뒤의 일이다. 그러나 여러 소왕국들을 옮겨 다녔기 때문에 편의상 독일로 표기되었다.]의 [[철학자]].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[[임마누엘 칸트|칸트]]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어받았다고 확신했다. 또한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[[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|헤겔]], [[요한 고틀리프 피히테|피히테]], [[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|셸링]] 등을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했다.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<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>는 철학([[인식론]])의 고전이 되었다.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<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>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에 출간하였다. 대학강의에서 헤겔과 충돌한 후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여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학교 밖에서 줄곧 독자 연구 활동을 지속하였다. 이후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의 증명과도 맞닿아 있음을 <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>라는 책에서 주장했다. 그 뒤에 윤리학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 출판하였다. <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>가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844년에 개정판을 출간하였다. 이후 <소품과 부록>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. 쇼펜하우어의 서적들은 주장이 굉장히 명쾌하다. 동시대 인기 철학자인 [[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|헤겔]]과 비교했을 때 헤겔은 현학적인 문장으로 읽는 사람을 난해하게 하는 반면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명료하고 지시성이 있다. 그의 저서에서 [[언어철학]]적 입장이 잘 드러나는 이유이기도 하다. 쇼펜하우어는 1820년 대에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[[힌두교]]와 [[불교]]에 관해 알게 되었다. 이 종교들의 핵심교리 속에 자신과 칸트가 도달한 결론과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. 먼 과거의 동양 사상가들이 서양과는 전혀 다른 환경, 언어, 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서양철학의 과제에 대해서 같은 결론을 말한다고 생각했다. 이 발견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 철학의 세련된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. 쇼펜하우어는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한 철학자이자 자신이 [[무신론자]]임을 표명한 독창적인 철학자로 손꼽힌다. 19세기 말에 유행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.[* 브라이언 매기, 철학의 역사, 박은미 역, 2016, 쇼펜하우어 파트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